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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림버스 컴퍼니 9장 플레이 후기 및 예측(스포)

    TL;DR

    1. 9장에는 2가지 위화감이 있다. 하나는 “료슈 장인데 정작 료슈 개인 서사보다 림버스 컴퍼니 전체의 큰 떡밥이 더 전면에 나온다”는 점, 다른 하나는 “파우스트가 이미 추론 가능했을 일인데 왜 굳이 게젤샤프트에 확인받으려 했나” 하는 점이다. 위화감 자체가 작가가 일부러 심어 둔 핵심 단서일 것이다.
    2. 체호프의 총 관점으로 ‘아직 안 터진 떡밥’을 정리해보면, 파우스트의 두려움, 싱클레어가 말한 “줄기”, 연기전쟁 “1차”라는 표현, 게젤샤프트의 직접 등장, 호엔하임 관련 단서, 예전부터 반복된 “세계/흐름” 등의 표현이 있다.
    3. LCE 습격 같은 사건을 보면 단순 기술 돌파가 아니라 림버스 내부 상층부의 권한 개입이 있었다고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4. 파우스트 정도면 그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게젤샤프트에 질문했다는 점에서, 핵심은 “정보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이 확인될 경우 앞으로 자신의 계획이 무너질 만큼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5. 거울은 평행세계처럼, 현재 세계와는 연속성이 없는 별개 가능성이고, 줄기는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해 어느 시점 이후 갈라진 분기된 미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싱클레어가 본 건 그냥 다른 세계의 싱클레어가 아니라 현재 세계선과 이어진 미래 분기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호엔하임, 파우스트, 베르길리우스의 발언을 엮어 “흐름”을 단순 비유가 아니라 특정 세계선이 유지되도록 작동하는 강제력으로 해석해야 한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흐름을 감지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단순히 강한 특색이라서가 아니라 그 흐름을 읽고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림버스 컴퍼니의 길잡이로 필요했다.
    7. 단테의 시계 머리는 시간 측정 도구가 아니라 흐름과 분기를 조정하는 장치다. 그래서 단테의 부활 능력도 일반적인 되살리기가 아니라, “죽은 뒤 되살림”이 아니라 죽음이 발생한 분기 자체를 무효화하고 이전 흐름으로 되감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되면 단테, 시곗바늘, 관리자 보존, 흐름 통제라는 테마가 하나로 연결된다.
    8. 로보토미/루이나/림버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사실 욕망, 의지, 미래다. 도시의 병은 의지를 잃은 상태이고, 빛은 그 의지를 다시 피워내려 했으며, 뒤틀림·죄종·E.G.O의 차이는 욕망과 의지를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갈린다. 죄종은 과거와 미래를 잃고 욕망만 남은 상태, 뒤틀림은 자아는 남았지만 욕망에 잡아먹힌 상태, E.G.O는 욕망을 의지로 자각해 미래를 만드는 상태다.
    9. 황금가지도 그냥 맥거핀이 아니라, 줄기에서 뻗어 나가는 미래 가능성의 응집체다. 즉 황금가지는 “무수한 분기와 가능성, 그리고 의지가 낳을 미래”를 상징한다.
    10. 게젤샤프트는 여러 세계의 파우스트들이 협력해 가능성을 모으고 성과를 틔워 미래를 만들려는 체계다. 그러면 파우스트가 황금가지와 미래, 관리자 파우스트, 게젤샤프트에 집착하는 이유가 하나의 목표로 수렴되고, 9장에서 던져진 수상한 요소들도 결국 그쪽 떡밥으로 읽을 수 있다.
    11. N사를 하이데거/후설의 현상학과 연결해 보면, 왜 경험, 고정, 못과 망치, 의체 혐오 같은 방향으로 가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림버스가 “가능성과 미래를 여는 쪽”이라면, N사는 그 가능성을 체험과 고정의 방식으로 붙잡는 쪽이라는 대비가 되고, 이것으로 대립이 설명된다.

    모든 답은 남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모든 답은 남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번 9장은 프로젝트 문의 미디어믹스에서 등장한 수많은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어, 프로젝트 문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읽어 본 나에게도 즐거운 일이었다. 또한 그동안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비로소 한 방향으로 정렬된 꼭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발전한 림버스 컴퍼니의 스토리텔링과 어울리지 않게, 내게는 두 가지 부분이 굉장히 위화감 있게 보였다. 처음에는 이야기 자체의 여운 덕분에 그냥 넘어갔지만, 곱씹어 볼수록 의문스럽더라.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오래 정리하자, 그 물음표의 시작은 다음 두 갈래로 수렴되었다.

    1. 료슈의 장인데, 료슈보다도 림버스 컴퍼니와 미래 같은 큰 이야기들이 더 앞에 나와 있고 정작 료슈의 이야기는 감정선은 크면서도 과정의 섬세함이 다소 비어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2. 가만히 생각해 보면 뻔하게 림버스 컴퍼니의 상층부가 이번 사태에 개입했음을 추론할 수 있고, 게젤샤프트의 다른 파우스트들 또한 이를 지적했음에도, 또 다른 ‘천재’인 ‘순진한 파우스트’가 ‘멍청한 파우스트’로 박제되는 모멸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구태여 확언을 받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잘 짜인 이야기에서 무언가 튀어 보이고 거슬리는 지점이 있을 때, 대부분 그것은 창작자의 의도가 깊게 개입되기 마련이다. 달리 말하면, 바로 그 거슬림이야말로 창작자의 의도가 가장 표층으로 드러나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1번에 대한 답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료슈의 감정선 대신 채워진 부분들에서 림버스 컴퍼니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달리 거슬리는 점도 많다. 패배 시의 문구도 뜬금없이 몇몇 전투에서 게임 시스템으로서 직관적인 Defeat 대신 Fate lost로 바뀌었고, 다른 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파우스트의 불안감 또한 직접적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고 내가 적은 두 번째 의문 또한 그러하다.

    알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강화하고 서사를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한 문학 장치론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로 안톤 체호프가 만든 ‘체호프의 총’이 있다. 다들 어느 정도 알겠지만, 그 이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적혀 있다.

    만약 1막에서 무대에 권총을 걸어두었다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것이 발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걸어두지 마라.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것은 작가의 정신과 시간을 무던히도 소모하는 일이다. 작가가 정신을 소모하여 구태여 적어 둔 이야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프로젝트 문이 써 내려간 이야기의 소비자들은 바로 그 ‘총과 격발’ 사이의 정교한 연쇄에 감탄했기 때문에 이 세계관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김지훈이라는 작가는 이야기의 재료들 각각에 ‘하나의 과목 수준’의 깊이를 전달하지는 않을지언정, 최소한 ‘그냥 겉멋으로 그 재료들을 소모해버리는’ 글쓴이는 아니었다.

    아직 격발되지 않고 그저 쌓여만 있는 이야기들

    이 관점에서 거슬리는 점, 달리 말해 아직 격발되지 않은 총들을 앞서 말한 것들을 포함해 이번 장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것을 알고 있던 파우스트가 다른 장들과 달리 ‘두려움’을 많이 표출한다
    2. 싱클레어는 ‘어떤 줄기’로 간 미래가 있다
    3. 그 줄기의 미래에서 연기전쟁에 1차가 붙었다는 말은 곧, 1차 이후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4. 그 줄기의 싱클레어는 파우스트에게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슬퍼하지는 말라’고 한다
    5. 여러 팀들 중에서, 약지 전투 팀은 최소한 특색 1명이 포함된 다른 팀과 달리, 인게임 전투 레벨이 겨우 45인 호엔하임이 함께한다
    6. 게젤샤프트가 비단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직접 등장’한다
    7. 파우스트는 모멸을 감수해 가면서 질문에 대한 응답을 구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엮어서 볼 수 있는 앞선 이야기에서의 ‘격발되지 않은 총’들도 많다.

    1. 5장 리카르도전에서, 파우스트가 말한 ‘세계’
    2. LCB 정기검진: 호엔하임이 언급한 ‘관리자가 보존되는 흐름의 세계’
    3.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에서부터의 ‘흐름’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모든 것들은 ‘미래시’라는 키워드 하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은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장 앞서서 눈에 띄게 거슬렸던 부분인 ‘파우스트의 질문’에 대해서 해부해 보자. 사실 파우스트가 도시에서 제일 가는 천재 중 한 사람이라는 것과, 그 천재가 여러 세계에 대한 관측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파우스트가 거미집에 의해서 LCE가 공격받을 수 있었던 근원을 추측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이건 우리도 쉽게 ‘감’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특히 전작의 등장인물이 거의 다 등장했는데 ‘디아스’만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로 그 근원이 디아스라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파우스트’보다도 전지한 ‘독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것이니, 작중 ‘순진한 파우스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만으로도 유추 가능한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파우스트가 게젤샤프트를 통하지 않고서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 인정하긴 싫지만, 호엔하임 또한 자신과 자웅을 겨루는 천재다. 그는 스스로 드러내진 않지만 과거 로보토미의 사건에 대해서 여전히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만든 보호 시스템은 그 보호 범위에 대한 권한은 호엔하임에게 없을지언정, 그 시스템 자체의 완성도는 어지간한 기술로는 뚫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2. 거미집은 무력집단이지, 기술집단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의 영역에 해당하는 약지가 그나마 학술적인 성격을 가지나 근본적으로 미학 중심이라 이런 기술을 파훼할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고, 검지의 지령은 이런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엄지·중지·소지는 아예 논외다. 그렇다면 거미집이나 그 연관 단체가 독자적으로 이를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보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3. 림버스 7.5장에서 직접 밝혔듯, 파우스트—그리고 게젤샤프트, 호엔하임과 공석이 된 W사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업으로 LCE는 안전히 보호되었다. 그 정도로 철저히 전사적으로 보안을 기울인 것이 쉽게 뚫릴 리는 없다.
    4. 우제트 정도의 무력이 너무나도 손쉽게, 그것도 너무 좋은 타이밍에 무장해제되었다.

    본편 시점의 습격이 큰 일이었던 만큼,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작은 추가 가정을 더했을 때 모든 것이 아귀가 맞는다면, 그것이 가장 나은 설명일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에 ‘기술 문제가 아니라 권한의 문제, 즉 림버스 컴퍼니 내부에서 이 모든 것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누군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 존재를 가정했을 때, 피해 규모로 생각하면, 그리고 뒤틀림 탐정에서 묘사되는 디아스의 정보 수집력을 생각하면 그가 이를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디아스에 의해 직접적으로, 그의 개입 정도를 가장 줄여서 본다고 해도 최소한 묵인 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파우스트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순진한 파우스트’는 이것을 ‘멍청한 파우스트’가 되어 가면서까지 게젤샤프트에 질문했을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결론의 후폭풍이다. 이 결론이 사실이라면 너무 위험하다. 파우스트는 아직 추론한 적 없는 자기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 이해관계가 맞는 여러 사람이 속한 림버스 컴퍼니에 같이 속해 있다. 그런데 그 안의 구성원, 그중에서도 자신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면, 앞으로 파우스트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으로도 게젤샤프트에게 계획에 숨은 요소들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게젤샤프트에서의 대화에서 그 답을 확언해 준 것으로 보아, 게젤샤프트는 디아스에게 지배받는 조직은 아닐 텐데 말이다. 거기다 지금의 세계 속에서 파우스트 말고 게젤샤프트에 접근 가능한 존재도 없을 텐데. 만우절을 통해 웃긴 형태일지언정 우리 모두가 확인했으니까. 파우스트의 육체가 파우스트의 정신을 품지 않는 한, 게젤샤프트가 다른 이들에 의해 위협받을 일은 없는데, 파우스트는 왜 이다지도 불안해하는 것일까?

    거울과 줄기, 그리고 흐름

    이번 장에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1차 연기전쟁’이 언급된 것이겠지만, 오히려 내게 더 이목을 끈 것은 ‘줄기’였다. 전작들 이후 림버스 컴퍼니에서 다뤄지기 시작한 가장 흥미로운 세계관 설정인 ‘거울’과는 미묘하게 다르니까.

    거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평행세계와 비슷하게 동작한다. 각각의 평행세계에서 ‘누군가의 역할’에 해당하는 자리에 우리 세계선의 ‘수감자’들이 감으로써, 지금 세계관의 ‘누군가’ 및 ‘수감자’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선이다. 하지만 거울 세계 속의 존재들은 결국 지금 세계의 수감자와는 별개의 존재다. 약지 스튜던트 이상도, 소지 제자 싱클레어도 지금 세계선의 싱클레어와 연속성이 없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들은 LCB에 속해 본 적이 없다. 마치 거울의 겉의 존재와 안의 상이 절대로 서로 닿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비슷한 가능성을 비추지만 절대로 그 존재들은 서로 이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존재는 시작점이 다르니까. 거울의 안과 밖은 서로를 바라볼 뿐, 절대로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유리창 파생기술 중 거울이 가장 안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 둘이 ‘합쳐지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이것이 환상체에게서 끌어온 E.G.O에는 침식되지만, 거울세계의 인격에게는 침식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E.G.O는 순간이나마 그 존재에게 ‘이입하는’ 것이지만, 인격은 ‘거울 세계의 별개의 존재를 순간 빌려와 이 세계의 수감자 위에 덧씌우는, 달리 말해 원래의 상 위에 그 가능성이라는 빛을 덧입히는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줄기’는 다르다. 어느 싱클레어는 분명 LCB에 속한 적이 있다. 본인 입으로 말하니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금의 세계선에서 진행된 시점에서 더 나아가 어떤 줄기에 다다른 싱클레어일 것이다. 그리고 줄기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는’ 것이니, ‘분기’라고 명확하게 고쳐 써도 무방하겠다. 다시 말해, 같은 시작점에서부터 연속한 존재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확고히 분기하여 가닿았기 때문에 이것은 거울이 아니다. 별개의 시간축이 아니라 동일한 시간축을 거친 다음 어느 시점에서부터 분기한 것이니까. 그러니 나는 결정적인 차이를 ‘존재의 시간 속에서의 연속성’이라고 부르겠다. 거울 세계는 그 연속성이 현재 세계선의 수감자와는 없지만, 줄기에서 서로 다른 시점의 수감자들에게는 같은 분기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표현에 대한 정리는 끝났다.

    1. 싱클레어는 ‘어떤 줄기’로 간 미래가 있다.
    2. 그 줄기의 미래에서 연기전쟁에 1차가 붙었다는 말은 곧, 1차 이후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는 것이 있다. 그 중 일부를 더 가져와 보자.

    • 여러 팀들 중에서, 약지 전투 팀은 최소한 특색 1명이 포함된 다른 팀과 달리, 인게임 전투 레벨이 겨우 45인 호엔하임이 함께한다
    • 5장 리카르도전에서, 파우스트가 말한 ‘세계’
    • LCB 정기검진: 호엔하임이 언급한 ‘관리자가 보존되는 흐름의 세계’
    •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에서부터의 ‘흐름’

    이 중 뒤의 세 가지를 엮어서 보겠다. 호엔하임이 가장 결정적인 힌트를 줬다. ‘흐름과 세계’를 한 문장 안에 편입시켰으니까. 무엇보다 림버스 컴퍼니가 시작된 이후 시점에서의 표현들인 만큼 파우스트의 ‘세계’와 정기검진에서 말한 ‘관리자가 보존되는 흐름의 세계’에서 지칭하는 세계는 아마 동등한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표현은 같지만,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흐름’이 과연 호엔하임이 말하는 ‘흐름’과 같은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리바이어던을 본 독자들이라면 베르길리우스가 림버스 컴퍼니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에는 아마도 가넷과 라피스, 그리고 이 둘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었던 도시에 대한 분노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림버스 컴퍼니가 ‘굳이’ 다른 존재도 아니고 베르길리우스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계약은 쌍방 간에 이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가 강한 동기를 갖고 있다고 해도, 림버스 컴퍼니 입장에서의 실익이 없다면 둘 사이의 계약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구나 베르길리우스가 림버스 컴퍼니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림버스 컴퍼니에서 베르길리우스를 찾아갔음을 생각하면 이 이유를 공백으로 두는 것은 이상하다. 만일 힘이 필요했다면 다른 특색도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테의 의체 형태도, 굳이 12 수감자를 고른 이유도 분명히 존재하는 림버스 컴퍼니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베르길리우스를 ‘그저 강해서’ 길잡이로 선택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베르길리우스’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하지 말아야 했던 것을 돌이켜 보면 그가 림버스 컴퍼니와 ‘계약’으로 해야만 했던 일에 조금 더 힌트가 보일 것 같다. 6장 시점에서 베르길리우스가 한 말을 다시 돌이켜 보자.

    아주 오랜만에 거대한 흐름이라는 걸 따라가 보고자 했더니… 큰 흐름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냄새와 풍경만큼은 허용할 수가 없더군.

    그리고 리바이어던에서 베르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뒷목부터 서늘하게 감겨오는 이 감각을 무시해서 좋았던 적은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어깨 위에 올라타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손가락을 가리키는 듯한 꺼림칙하고도 거스르기 어려운 압력. 나는 이걸 ‘흐름’이라고 불렀다. 해결사 생활을 지속해 오는 동안 그 압력은 더욱 강하고 또렷하게 지시를 내려왔다. 어쩌면 축적되어 온 경험이 이럴 때 본능처럼 터져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흐름에 가넷을 태웠다. 그리고 불어오는 흐름에 따라 순항하고 있었다.

    일단 두 표현 모두에서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기본임을 강력하게 내세운다. 묘사는 많지 않지만, 짧은 표현 안에서도 이것을, 특히 6장의 경우는 그것만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이 두 표현은 적어도 제한된 정보 하에서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호엔하임의 표현과 같이 이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로, 남은 베르길리우스의 표현 중 나는 ‘거스르기 어려운 압력’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에 따라 가장 나은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감’을 ‘경험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프로젝트 문 세계관에서 으레 그렇듯 다른 표현들과 엮어 보면 어떠한 ‘초자연적인 인과율에 대한 강제력 있는 힘을 인식하는 능력’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림버스 컴퍼니 입장에서 LCB의 ‘길잡이’여야만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호엔하임이 말한 ‘관리자가 보존되는 흐름의 세계’는 다시 말해 ‘관리자가 보존되는 강제력이 발휘되고 있는 세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싱클레어의 표현과 엮어 보면, ‘어떤 분기에서도 관리자는 보존되는 강제력이 전체 분기에 걸쳐 작용하는 세계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적어도 어떤 시점까지는.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유용한 작은 분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가 파우스트, 나아가 림버스 컴퍼니 입장에서 필요했기 때문이라면 ‘반드시 베르길리우스가 길잡이어야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제 파우스트의 표현까지 곁들여서 생각을 해 보자. 파우스트는 중지의 난입이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말을 바꾸긴 하지만 분명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 단테에게 자폭을 종용한다. 얼핏 보면 단테의 황금가지와 베르길리우스의 표현을 더해 생각하면 단테의 시곗바늘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이런 뜻이라면 어떨까?

    관리자가 보존되어야 하는 강제력이 작용하는 세계선에서, 예정에 없던 중지가 난입해 관리자를 보존하려는 큰 방향의 흐름을 무효화시킬 정도의 예외가 발생해 버렸고, 당신이 소멸한다면 그 강제력이 어디로 튀어서 어떤 여파를 낳을지 알 수 없고 운명 자체가 소실될 수 있으니, 어느 방향이더라도 이 세계의 흐름에서 나는 끝났고, 이 분기가 연쇄되는 흐름 속에서의 당신이라도 보존하기 위해서 이 분기에서의 당신을 무효화하세요.

    이렇게 생각하면 파우스트가 구태여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납득된다. 그런데 그러면 여기에서 더 나간 의문들이 생긴다.

    1. 강제력이라면서 왜 무효화되지?
    2. 흐름에 대한 예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고, 기능이 무엇이지?
    3. 그 예정에서의 예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단테의 머리, 시곗바늘, 머리의 금기를 어기지 않는 ‘부활’, 전진, 게젤샤프트

    단테의 머리의 형태가 시계인 이유에 대해서 파우스트는 6장에서 ‘무작위의 형태 중 임의로 지정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시계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많은 이들이 ‘지금의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계를 보지만, 동시에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표상이 변한다. 즉,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고 특정한 시점의 시간을 고정하고 확인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작중에서 농담처럼, 프로젝트 문 세계관에서 그냥 하는 농담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수없이 언급되듯 단테의 시계 머리는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이 없다. 그렇다면 단테의 머리에 남는 시계로서의 기능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단테는 시간을 ‘되돌려’ 수감자들을 부활시킨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개념을 앞서 이야기한 ‘흐름’ 개념과 이어 보면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수감자의 사망이나 전투 패배 분기가 일어난 이전 시점으로 수감자를 되돌린다

    즉, 시간의 ‘흐름’ 개념과 ‘줄기’, ‘어떠한 흐름의 세계’ 개념을 이으면 단테의 머리는 ‘어떤 흐름의 세계에서 분기를 통제하는 능력’을 ‘시계’로 표상화한 것이라고 일관되게 이어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부활의 개념과 다르다. 일반적인 부활은 ‘사망 이후에 생명의 연속이 다시 덧대어지는 것’이지만, 이 경우는 ‘사망이라는 분기 자체를 무효화’하는 방식이니까. 그렇다면 머리가 LCB의 되감기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머리에게 도시에서 바로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단테의 머리에서 시계 본체보다도 베르길리우스의 표현에서 ‘시침과 분침’을 중시한 데서 엿볼 수 있듯, 바로 이 ‘흐름의 통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베르길리우스가 이것만큼은 방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5장에서 단테의 독백으로 이 해석을 더 강화할 수도 있다.

    내가 시간을 끌어모아 시침과 분침을 돌리는 이유는,
    수감자들의 무수한 방황을 고정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방향을 잃은 모든 이들을 위해.

    내 방향을 잃지 않도록.

    이 해석이 이전의 설명과 일관되게 이어지니, 그럼 더 나아가 보자. 4장과 7장 시점에서는 다른 장과 달리 후일담 종료 시점에서 단테의 분침이 전진한다. 이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수감자의 입사 조건과 소망이 이뤄질 때 전진한다는 가설, LCB 일행 스스로 황금가지를 수복할 때, 수감자 자신과 관련된 인물을 직접 죽일 때, 수감자들이 로보토미 세피라의 미덕을 깨달았을 때 등 다양한 가설이 있었다. 다만 소망이 이뤄질 때 가설은 5장과 8장이 들어맞지 않는다. LCB 일행 스스로 황금가지를 수복할 때 가설은 불분명하다. 조력자가 ‘중대하게’ 개입했는가 여부도 그렇고, 9장 시점에서는 분명히 LCB가 스스로 수복했다고 볼 만한데도 시곗바늘이 전진하지 않았으니까. 수감자들이 로보토미 세피라의 미덕을 깨달았을 때 가설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은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용기’를 되찾았고, 돈키호테는 ‘똑바로 설 수 있는 의지’, 혹은 수감자들에게 ‘기꺼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대’가 되었지만, 동시에 홍루는 ‘굴레를 끊어내고 공포에 직면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이스마엘도 복수를 제외하고도 ‘존재의 의미에 대한 기대’를 가졌으니까. 수감자 자신과 관련된 인물을 죽였을 때라는 가설은 부정하기 힘들지만, 그렇다면 구태여 그 조건이 ‘시계’를 통해서 표상되어야 할 개연성이 없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작위의 형태 중 임의로 시계 전진이 선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가 말한 ‘흐름’을 바탕으로 이렇게 본다면 어떨까.

    이 세계선에서 단테가 달성해야만 하는 어떤 분기에 가닿기 위한 흐름에 크게 부합하는 조건이 충족되면, 즉 흐름에 순응하는 줄기로 강하게 분기하거나 흐름이 발생하면 시곗바늘이 전진한다.

    이것이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최소한 시곗바늘의 흐름이라는 ‘표상’을 해명하기에 더 일관된 해석이고,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추측과도 더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이 관점에서 이상이 삶을 이어나가는 용기를 되찾은 것과, 돈키호테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대가 된 것은 파우스트, 단테, 베르길리우스, 더 나아가 림버스 컴퍼니의 목표에 가닿기 위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셈이다. 이스마엘과 홍루, 그리고 싱클레어는 불완전할지라도 이들의 각성도 분명 값진 일이었지만, 목표에 가닿는 것을 강하게 ‘확정’ 지을 정도의 모멘텀은 아직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사실상 수감자들이 황금가지 수복 말고 무언가 큰 변화를 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3장까지의 이야기는 제외해도, 5장 시점에서는 에이해브가, 8장 시점에서는 선황충이 림버스 컴퍼니의 적대 세력인 N사에 직접적으로 포섭되기도 했었다. 9장은 오히려 불안 요소가 엄청나게 추가된 시기고. 그렇다면 이들 이야기에서는 특정한 분기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했거나, 최소한 강한 불안 요소가 여전히 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최소한 내게는 다른 가설들보다 더 일관되어 보인다.

    그렇다면 게젤샤프트는 어떨까. 파우스트는 지금까지 게젤샤프트를 통해서 간단한 정보들을 열람하여 판단을 강화하는 류의 용도로 많이 관찰되었다. 그런데 9장 시점에서 우리가 본 게젤샤프트를 이용하는 ‘순진한 파우스트’의 모습을 보면, 파우스트가 ‘디아스가 흑막임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천재’라는 초반의 가설을 유지하면, 이전과는 다소 다른 뉘앙스가 덧대어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건 감각 범위의 한계로 그저 입수하지 못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 게젤샤프트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파우스트는 지금까지 구태여 검증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본인의 지능만으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경우에는 구태여 게젤샤프트를 사용하지 않고 ‘납득’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더 보고 있다지만 지능이 파우스트보다는 한참 ‘모자’랄 우리조차도 잠시만 생각하면 쉽사리 닿을 수 있는 결론을 구태여 확인하고 있으니까. 이미 아는 답을 구태여 확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 답을 감정적으로 ‘믿을 수가 없어서’가 아닐까? 이전까지의 게젤샤프트의 용도가 ‘인지 범위의 확대’였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판단에 대한 확언’에 더 가까운 것이다. 다른 파우스트들처럼 이것을 순수하게 ‘인지 능력’으로 한정하는 태도로 보면 이는 ‘멍청한 파우스트’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했을 때 내가 게젤샤프트에 있다면, 나는 ‘불안한 파우스트’ 정도로 새 별명을 붙이겠다.

    그렇다면 파우스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불확정성, 관측, 그리고 줄기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전 질문에 대한 답의 출발점으로 흑수 묘 필두 파우스트의 이 대사를 보자.

    아는 건 전부 다 알지만 모르는 건 모른다니. 그건 홍원 거리에 지나다니는 아무개를 잡아 와도 똑같을 텐데.

    사건의 연속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결말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지식의 앎’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대해서 서술하기 때문에 후향적으로 어떤 식으로건 그 인지 범위에 가닿았을 때 사고력이 충분하다면 ‘이해하게’ 되니까. 그러나 사고를 할 때의 시제에 대해서 현재는 ‘이미 일어나는 중’이므로, 그 찰나의 일차원적 경계인 현재는 과거로 친다면, 미래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파우스트가 늘 말하는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안다’는 말에서 ‘지식’이 아니라 ‘모든 것’이라고 구태여 지칭한 것은 프로젝트 문의 작법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일’을 포함한 것이라고 지칭하면, 파우스트의 이 말은 실상 이런 뜻이다.

    파우스트는 과거와 미래의 일을 모두 알아요

    그런데 이러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한다. 당장 앞에서 끌고 온 흑수 묘 필두 파우스트의 문장만 보더라도 ‘아는 것만 알’고 있으니까. 달리 말하면 파우스트, 그러니까 게젤샤프트에게는 ‘모르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어째서 늘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까?

    여기서 우리는 ‘게젤샤프트’가 구태여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널리 알려질 만한 사건들에 모두 접근할 전지함은 이미 지금의 인류도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다. 이보다 더한 개별 사실에 대한 인지 확장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파우스트의 지성으로는 ‘세계를 동시에 관측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더 쉬울 일이다. 그리고 실은, 이 정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생각하면, 파우스트의 지성이라면 어떤 식으로건 그냥 ‘응시자’와 연결고리를 트는 편이 차라리 더 비용이 적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묘사된 파우스트들이 그리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파우스트에게 불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히스클리프에게 사실을 말할 때 두괄식으로 말할지 말지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조차 효율을 따질 정도’의 파우스트의 특성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게젤샤프트는 비단 이런 목적으로 유지되는 개념은 아닐 거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게젤샤프트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게젤샤프트는 ‘거울 세계의 파우스트들의 정신 집합체’다. 그렇다면 거울 세계의 파우스트들이 서로 주고받는, 더 속되게 말해 이익사회, 게젤샤프트의 구성원으로서 ‘거래하는’ 것은 각자의 거울세계라서 달라지는 것, 즉 그 세계 안에서만 관측할 수 있는 개별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로보토미 직원 파우스트가 게젤샤프트에서 냉대받는 것은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래의 기본은 높은 희소성이고, 게젤샤프트에서는 당연히 ‘거울 세계에서 관측한 사실의 특이성’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로보토미 직원 파우스트가 내보일 수 있는 사건은 ‘로보토미의 멸망’이고, 이건 어느 세계선에서나 사실상 확정되는 정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게젤샤프트의 본질적 특성인 ‘이익 추구’와 ‘판단 불변’의 면에서 거부하지만, 다른 세계선에 대해서 게젤샤프트가 계속 물을 정도로 ‘희귀한 정보’를 갖고 있는 ‘흑수 묘 필두 파우스트’가 왜 그다지도 게젤샤프트 참여를 독촉받는지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게젤샤프트의 기능은 ‘거울 세계에서 관측한 사실의 교환’일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에 가까운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적 추정에 여전히 빠진 부분이 있다. ‘왜’? 다시 말해, ‘무슨 목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합의해 온 사고로 다시 돌아가 보자. 림버스 컴퍼니의 구성원들은 흐름, 분기, 줄기에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정작 림버스 컴퍼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거울 세계’는 얼핏 보면 비슷한 범주에 속하는 듯하지만, 흐름, 분기, 줄기와는 살짝 결이 다르다. 앞서 짚었듯, 이 둘은 결정적으로 ‘존재의 연속성’ 부분에서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럼 본질적으로 결국 섞이지 않는 개념이 파우스트를 통해서 림버스 컴퍼니에 덧대어져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행위는 ‘예측’이다. 예측은 ‘관측된 사실’, 즉 ‘과거로서 고정되어 버린 사실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추론하여 과거의 사실에 가깝게 근사해 내는 과정’이다. 즉, 게젤샤프트에서 거래되는 정보들은 결국 ‘지식에 대해서는 전지한 수준인 파우스트들이 이미 관측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시점에 관측된, 다시 말해 과거가 되어버린 정보들을 교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게젤샤프트의 목적은 ‘미래 예측’인 것이다. 그렇다면 림버스 컴퍼니에서 파우스트의 역할도 보다 선명해진다. 베르길리우스가 ‘이 세계선 안의 현재의 흐름’을 읽고, 파우스트가 ‘서로 다른 세계들에서 관측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흐름을 예측’한다면, 이 둘이 단테를 보조하는 기능을 하는 이유도 보다 더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는 것만 아는 것’, 다시 말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른 무엇보다도 ‘흑수 묘 필두 파우스트’의 인격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을 추론할 수 있다. 다시 인용하겠다.

    …그만, 그만 문의하세요. 모르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설명해야 하는지

    주군의 수상쩍은 행동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가주 심사를 대비해서 주군이 원대한 계획을 준비한 것도요.

    대관원의 귀한 옥이자, 가씨 가문의 보석. 그렇게 독차지한 사랑을 권력처럼 휘두르며, 원하는 것을 하나씩 손에 넣으신 것도.

    마음에도 없으신 설가의 여식을 홀려 수많은 기밀을 빼내신 것도.

    게젤샤프트에서 정보를 가져오기 위한 수단으로 저를 보살핀다는 것도.

    파우스트가 이야기할 필요 없이,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정명(正名)이라는 대의 아래, 가혹한 처사를 반복하고 계시죠.

    여기서 첫 번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게젤샤프트가 흑수 묘 필두 파우스트에게 계속해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그것을 제공받지 못한다면 게젤샤프트는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게젤샤프트가 정보 제공을 이토록 요구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없으니, 효율적인 귀류로서 본래의 것이 참이라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개별 파우스트가 알고 있다 해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게젤샤프트는 알 수 없다’는 것도 쉬이 유추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게젤샤프트는 개별 노드의 독립성과 개별 노드의 인지 한계 때문에 많은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지하지는 않고, 때문에 게젤샤프트에서 제공받지 못한 정보라면 개별 파우스트는 지식조차도 스스로의 인지에 닿지 못한다면 알 길이 없으니, 예측 또한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더 솔직하게는 ‘모든 것을 알 “가능성”이 있음에도, 아는 것만 아는’ 게젤샤프트의 한계다.

    좋다. 여기까지는 꽤나 명징해졌다. 그런데 왜 림버스 컴퍼니의 ‘순진한 파우스트’는 이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지하지 않을지언정 이토록 강력한 도구가 있는데? ‘현재시’에서의 흐름을 직감하는 베르길리우스와, 거기서 뻗어나갈 ‘미래’를 예측하는 파우스트가 있다면 이 시스템에서 두려워할 이유는 적지 않을까? 게젤샤프트의 한계는 베르길리우스라는 카드를 영입함으로써 충분히 해소된 것 아닐까? 파우스트가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이유가 있을까? 9장에서의 대사로 돌아가자.

    파우스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저 역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더군요. 당장 앞으로 가야 할지, 멈춰서야 할지. 혹은 반대로 가야 할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선택까지도… 그때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파우스트는, 언제든 떠나가 버릴 수 있는 이름에 불과하다고.

    표면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예측했고, 이 글 안에서도 다시 해부하여 짚었던 ‘게젤샤프트’ 자체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더 렌즈를 깊게 파고들어 보자.

    파우스트는, 언제든 떠나가 버릴 수 있는 이름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게젤샤프트의 ‘한계’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데 ‘떠나감’은 단순 기능 문제와는 다른 문제다. 지금껏 파우스트가 게젤샤프트에 연결할 수 없었던 정사에서의 역사는 워프 특급 살인사건뿐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게젤샤프트에 접속할 수 없다’고 표현했지, 게젤샤프트가 ‘떠나갔다’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게젤샤프트가 림버스 컴퍼니 세계선의 파우스트를 버린다
    2. 게젤샤프트의 예측 범위에서 림버스 컴퍼니 세계선이 지나치게 벗어나 버려서 애초에 게젤샤프트의 유용성이 소멸한다

    이제 우리는 림버스 컴퍼니의 파우스트가 ‘어떤 미래’를 추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장의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는 유독 ‘Fate lost’라고 표현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운명, 즉 미래가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 즉, 거미집 구성원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파우스트가 가닿고자 하는 ‘미래로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분기’인 것이다. 인게임 정보로 허투루 쓰지 않는 프로젝트 문이니까. 3개로 나눠진 림버스 컴퍼니의 거미집 섬멸 작전을 보자. 약지 아비를 상대하지 않는 모든 전투의 수감자 인격은 특색이 참전한다. 심지어 베스파 루트는 특색인 베스파뿐 아니라 애즈라와 모제스가 같이 도와준다. 유달리 마티아스가 짜증 나게 굴긴 했지만, 아무튼 가장 든든한 힘이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도움을 건넨 것이다. 인게임에서도 공격·방어 레벨 모두 90에 근접한다. 애즈라가 그나마 낮아서 70대에 머무르고, 베르길리우스는 언제나처럼 최상위권의 레벨을 자랑한다. 모제스는 아예 명시적으로 표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호엔하임의 숫자는 충격적이다. 방어 레벨이 고작 48이고, 공격 레벨은 가장 높은 것이 50이다. 이것은 현 시점에서의 수감자들보다도 명백히 약한 숫자다. 분명 거미집 태우기 작전의 구상에 파우스트가 참여했을 텐데, 이것의 문제를 몰랐을까? 글쎄. 게젤샤프트를 떠나서 그것은 파우스트의 인지 능력을 너무 얕보는 것이 아닐까?

    호엔하임이 도박을 언급한 데서, 그리고 애초에 파우스트가 싱클레어의 ‘어느 표지’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것이 발현되어서 미래 분기에서 ‘어느 싱클레어’가 불려온 것을 보면, 이것은 어느 정도 의도된 정황으로 보인다. 싱클레어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시련을 의도했을 거다. 문제는 호엔하임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파티는 실제로 가장 큰 ‘운명 상실’의 위기를 직면했고, 흐름과 별개로 이렇게 불리한 정보가 게젤샤프트로부터 제공된 정보를 기반으로 유추할 수는 없었기에, 그 빈 정보가 남음으로써 직접 체감한 ‘불확정성’의 위력을 몸소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운명을 지켜내고 싱클레어를 각성시켰으니 끝났다고 하기에는, 이제는 미래 분기의 싱클레어가 하는 말이 문제가 된다.

    호엔하임: 부하를 둘이나 잃을 처지에 놓인 마당에 죽을 고비가 찾아오니까 나도 모르게 살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더군. 웃긴 노릇이지.

    어느 싱클레어: 안심하세요, 저분은 어떤 형태로든지 이겨내서 삶을 이어 나갈 거예요. 당신의, 우리의 생각보다 억센 분이시거든요.

    호엔하임: …그런가, 다행이군. 몇 년 후에서 온 건가?

    어느 싱클레어: 그건 말할 수가 없어요.

    호엔하임: …불행히도 그리 낙관적인 미래로 보이진 않는데.

    어느 싱클레어: 여기서 보면 과거도 그리 낙관적이진 않아요. 비록 1차 연기전쟁이라는 단어가 생길 줄 이때는 상상도 못 했었지만.

    이스마엘: 저… 어떻게 된… 건가요? 파우스트 씨 당신 눈에도 보여요? 제가 피를 많이 흘려서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

    파우스트: …네. …표지가… 당신을 부른 거군요.

    어느 싱클레어: 표지는 매개체였을 뿐, 부른 주체는 결국 저예요. 동시에 발현되고 소환되어 버린 거죠.

    파우스트: 그렇다면 혹시…

    어느 싱클레어: 아… 모든 표지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제 표지가 이런 힘을 가진 거죠.

    이스마엘: 그러니까… 당신… 미래에서 왔다고요? 거울세계가 아니고요…? 그, 그럼 원래 싱클레어 씨는요?

    어느 싱클레어: 원래라는 건 없어요. 이건 거울세계의 방식과는 다른… 갈라진 줄기에 가까우니까요.

    이스마엘: 잠깐만요, 그러니까… 반드시 오는 건가요? 당신이 겪고 있는 그… 미래가…

    어느 싱클레어: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럴지도요. 그렇게 비참하진 않아요. 어떻게든 살아지니까요.

    이스마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건가요?

    어느 싱클레어: ……. 제가 불려 오기까지 겪었던 그 일상이… 여러분에게도 이어질지 혹은 피해 갈지는 모르겠어요.

    파우스트: …그래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어느 싱클레어: 네, 힘든 길이 될 거예요. 아주, 많이. 지금은 이런 생각도 들어요. 어쩌면… 제가 걸어온 여정과 싸워온 전쟁터 속의 모든 경험은… 이 세계로 불러와지기 위해 만들어진 곁가지 세계 속의 일은 아니었을까.

    호엔하임: 모든 것은 이제 추측의 영역일 뿐이지.

    어느 싱클레어: 맞아요. 그래도 제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받아들이는 게 낫겠죠. 아쉽네요, 다른 분들도 전부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얼굴도 있었고. 종종 떠올라요. 버스에서의 그 나날들이. 그리고 여기서는 그것만이… 지금 제 나날들을 지탱해 주는 것 같아요.

    이스마엘: …….

    어느 싱클레어: 이제 떠나야겠어요. 더 그리워지기 전에. 떠나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걸로 저는 죽는 것처럼 사라질 수도 있겠죠. 제가 그렇게 죽었는지 아닌지는 여러분도 저도 모르겠지만. 설령 제 존재가… 존재의 의미가 이걸로 끝이더라도. 죽어가는 동료들의 얼굴 대신, 반가운… 그리웠던 얼굴들을 봤으니 만족해요.

    일단 파우스트는 표지의 기능을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에서 암시되듯, 싱클레어의 표지는 ‘가능성’이니까. 게다가 표지를 각성하는 것이 정말 절실해진 미래 시점에서조차 싱클레어가 몰랐다면, 파우스트도 언질을 줄 수 있는 순간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럼 싱클레어의 표지는 예측이 불가능한 ‘무구한 가능성’이었고, 파우스트의 예측은 적어도 이때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관측이 필요했지. 그 예측으로 끌려온 가능성이 바로 ‘분기의 가능성을 끌고 오는 것’이라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싱클레어의 가능성을 일깨워 현재의 시간선에서 고정함으로써 불확정성을 발현시켜 믿을 수 있는, 관측된 가능성으로 변환하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미래로만 남겨지지 않도록 해 불안 요소를 해소하고 파우스트가 가닿고자 하는 미래로 나아갈 분기의 조건을 충족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다다르는 과정 자체의 불확정성도 미래 상실의 위기를 초래할 정도였는데, 싱클레어가 말하는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파우스트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한 번에 제공받는다. 먼저 싱클레어의 표지가 ‘미래 어느 분기의 싱클레어’를 끌고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 미래에는 연기전쟁이 다시 발발했으며, 미래 시점의 싱클레어가 보기에는 이미 과거 시점에서도 위험 요소가 있었고,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분기한 자신의 미래에는 연기전쟁의 미래가 찾아왔고, 그래서 그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지금의 분기에게 확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미래는 대단히 힘들고, 볼 수 없었을 것이기에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얼굴도 있었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얼굴은 ‘억세게 살아갈 것’이라고 단정한 알리사를 제외한 파우스트, 이스마엘, 호엔하임 중에는 최소한 한 명은 확실히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은 다 어느 싱클레어의 미래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낮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예측의 본질로 돌아가 보자. 예측은 결국 확률 게임이다. 100%를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일에 대해서만이며, 예측을 하는 이유는 결국 미래를 가늠하고 근사하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100%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확률에 익숙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확률의 언어다. 즉, 현 시점에서 파우스트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싱클레어의 말과도, 그리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단계가 아닌 간신히 발현한 싱클레어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현재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가 선택되어 끌려온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 높은 해석, 즉 타당한 해석이다. 즉, 확률적으로 통찰해 보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는 ‘또 다른 연기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토록 불안정한 현 상황에서 이스마엘이 연기전쟁의 미래에 공포를 겪고 있다면, 작전 성공을 위해서라도 파우스트는 그 추론이 불건전하다면 불안함을 해소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그런데 파우스트는 그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파우스트는 이 미래를 정말로 ‘기댓값을 낮춰보지 못했기에 부정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앞선 구간은 ‘엄청난 밀도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가능성 중 하나에 대한 정보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구간’인 것이다.

    그러면 파우스트가 게젤샤프트에 한 질문은 이미 의미가 완전히 바뀐다. 위험 요인에 대해서 파우스트는 개입한다. 그런데 자신은 이미 그 답을 추론했다. 그러나 거기에 개입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만큼 큰 파장을 낳는 판단이므로. 동시에, 자신이 관측하는, 또 관리하는 세계선이 다른 파우스트들에게서 ‘파국을 관측하기 위한’ 버림패로 쓰이는 것이 아닌지도 확인이 필요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미 아는 문제를 묻는 것의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5장에서 자신이 탈락하는 분기에서조차 지키려고 했던 이 세계선의 존재 가치를 묻는 것이 되므로. 그리고 그는 다른 파우스트들의 응답으로, ‘완전히 버림받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존재 가치를 높게 평가받지도 못하는’ 자신과 그 세계선의 가치를 재확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 번 불확실성을 관측한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해소되지 않는 또 하나의 떡밥도 설명이 가능하다. 파우스트는 불확정성에 때로 매달리고, 때로는 관리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이 예측한 범위 안에서 ‘미래’를 관리해 왔다. 자신이 아는 정보 하에서 발푸르기스의 밤을 예측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테는 정확히 예측한다. 그리고 파우스트는 이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단테보다 멍청한 파우스트’로 독해하는 것은 재밌지만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파우스트는 분명 6.5장에서 ‘탐구하는 것의 재미’, 다시 말해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재미’를 다시 느꼈으니까. 단테가 파우스트를 비아냥댄 것도 아니고, 자신도 당황스러워하는 입장인데다 당장 6.5장에서 이상의 정정에 대해서 파우스트는 ‘당황했을지언정 불쾌해하거나 자존심 상해’ 하지 않았다. 지금의 설명에서 이어 보면, 이것이 또 다른 ‘원하는 분기로 가기 위한 단서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단테를 통해서 ‘발푸르기스의 밤을 예측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흐름을 더 가능성 높게 통제할 수 있는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게젤샤프트로부터 제공받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으니까. 불확실성을 통제 범위 안에서 믿으면서 관리하려는 파우스트에게는 이 또한 치명적인 두려움 중 하나일 것이다. 미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데,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게젤샤프트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라면 더 위험하고. 바로 이 위험한 처지를 파우스트가 재확인했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성능 좋은 한정캐’가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불안해’하는 이유가 더 구조적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동시에, 예측이 불완전한 만큼, 강제력도 6장에서 베르길리우스가 이미 한번 거슬렀듯이, 그 어떤 대가로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파우스트, 더 나아가 림버스 컴퍼니에 모인 이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왜 림버스 컴퍼니는 구 L사, 즉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기술 잔재들을 연구하고 수집할까?

    다시금,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으로. 죄악, 욕망, 미덕, 그리고 빛

    앞서 ‘가능성’이 확률의 언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가능성은 동시에 미래에 존재가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는 데 대한 기대를 뜻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게임의 세계관 안에서 ‘가능성’을 이런 언어로 쓴 존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환상체도, 뒤틀림도, 도서관도 그렇다. 도서관 자체가 무수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공간인 만큼, 이들이 뿌린 빛이 가능성으로서의 뒤틀림이나 E.G.O를 끌어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빛이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 뿌리려 했던 것인 만큼,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진정한 목적인 ‘빛을 뿌리는 것’의 의미를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거기에는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애초에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은 ‘도시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지성을 지닌 존재는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한다. 따라서 ‘무언가 되겠다’는 의지를 품는 순간 그 존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의지 없이 그저 외부의 조건을 마주하게 되어 어떤 가능성에 가닿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순수한 관찰자적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다. 여기서는 미래 확률에 대한 어떠한 변동에도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는 순간, 확률은 분명하게 변동한다. 따라서 ‘도시 사람들의 병’은 바로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동시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인간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지를 잃어버린 이들은 당연히 자신이 가닿고자 하는 지점에 어떤 식으로든 도달하지 못하니, 당연히 그동안 뒤틀림도, E.G.O도 발현하지 못한 것이다. 미덕이 담긴 빛이 불완전하게나마 도시를 비추었을 때, 도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의지’가 다시 피어났고, 그렇기에 뒤틀림과 E.G.O의 공통 전제 조건 중 하나인 ‘격한 감정’이 도시 사람들에게서 다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빛을 완성하기 위해서 ‘미덕’은 왜 필요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의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의지’는 ‘욕망’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욕망’은 그 자체로 ‘바람’이니 말이다. 그런데 ‘의지’는 ‘욕망’과 다른 단어다. 다른 단어라는 것은 분명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가 다르다는 뜻이다. 두 단어를 놓고 비교해 보면, ‘의지’에는 개인의 자아와 그것이 가닿고자 하는 방향, 그리고 미래가 담겨 있지만, ‘욕망’은 그 자아가 분리된 단순한 현재의 동태만이 남아 있음을 쉬이 알 수 있다. 따라서 세피라의 ‘미덕’이 ‘고난’을 통해서 수집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이 동태에서 방향을 올바른 방향으로 정렬하기 위해서는 방향이 소실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미리 던져지고, 그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 마음속에 무엇을 품어야 하는지 그 상황을 돌파해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 욕망이 방향성을 잃을 가능성이 배제될 수 있으니까.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 빛을 뿌리기 위해서 억겁의 시간을 거치며 모든 세피라들이 미덕을 발현하는 단 하나의 경우의 수를 찾아 헤매며 시뮬레이션을 가동한 것은 바로 그래서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빛 안에는 본디 욕망이 그것에만 그칠 가능성을 배제하여 단 하나의 남은 가능성인 의지로 고정하기 위해서 ‘미덕’이 함께 담겨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E.G.O를 개화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도서관에서도,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에서도 결국 ‘온전한 빛을 뿌리지는 못’하는 변수가 발생한다. 두 번 모두 도시 전역의 사람들에게 의지를 완전히 주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뒤틀림이나 E.G.O를 발현하지도 못하고, 또 가능성의 발현이 E.G.O로 고정되지도 못한 것’이다. 이는 백야, 흑주가 계속해서 ‘불완전한 빛’을 의미하고, 죄종도 뒤틀림도 ‘빛의 뿌림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지칭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종과 뒤틀림이 어떻게 E.G.O와 다른지 살펴보면 ‘미덕을 온전하게 함양하지 못했을 때’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 죄종과 뒤틀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선명해질 것이다.

    뒤틀림과 E.G.O의 결정적 차이점은 발현 과정에서 ‘카르멘의 목소리’에 굴복하는가 아닌가다. 그리고 카르멘은 자신이 그러했듯 ‘확고한 믿음과 의지를 상실’시키려 한다. ‘고난을 뚫고 나가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고통스러우니, 그냥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휘두르면서 사는 것이 편하지 않겠냐’고. 그 안락함은 도시에서 숨 쉴 틈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마음을 지운 이들에게 강제로 다시 쥐어진 마음으로 인해 고뇌하는 인간에게 ‘아름답고 따스한 목소리’로 들릴 만하다. 그렇기에 뒤틀림에는 욕망만이 남아 있으나, 나아갈 미래는 없기 때문에 그 표현태인 인간은 단지 자아가 남아는 있으나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휘두르지 못하므로, 역으로 욕망이 인간을 휘두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뒤틀림이다. 달리 말하면 뒤틀림은 ‘인간에게서 미래가 거세된 형태’다.

    그렇다면 시제의 관점에서 죄종을 분석해 보자. 인간은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고, 미래로 나아간다. 즉, 과거는 미래로 나아갈 자양분이 되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분기점인 동시에 과거화되는 미래, 동시에 미래화되는 과거다. 따라서 현재 인간의 행동은 과거부터 연속되어 온 인간의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이 과거는 바로 ‘자아’의 구성 요건이 된다. 그런데 죄종은 뒤틀림보다 더 단순한 형태로, 인간의 자아조차 남아 있지 않은 단순한 현재의 욕망의 표출만이 남은 형태다. 따라서 죄종은 ‘나아갈 미래도, 현재의 표출을 규정해야 할 과거조차도 삭제된 인간,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삭제되어버린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석은 육참골단의 단테의 발작과도 잘 이어진다.

    단테: …다들 마음속에 언제든 피어날 수 있는 씨앗을 갖고 있어.

    오티스: 관리자님?

    로쟈: 뭐라고 했어? 파우가 설명하고 있어서 겹쳐서 안 들렸는데…

    파우스트: …계속하자면,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뒤틀림으로 발전하고…

    단테: 그날의 빛이 사람들에 마음에 쐬여져 저마다 묻혀있던 씨앗을 피워낼 때…

    이스마엘: …관리자님?

    단테: 죄에 삼켜져서 ■■■ ■■■, 그 무엇도 아닌 사람들이 꾸고 있는 ■■ ■■ ■■ 형태를 빌어 ■■으로 태어나고.

    파우스트: 단테.

    이상: 단테! 괜찮은…

    단테: ■■ ■■■ 견뎠지만 자신의 죄를 ■■■■ 마음은 ■■■■…

    히스클리프: 뭐, 뭐야… 시계 대가리… 갑자기 무게 잡고 뭘 중얼거리는 거야?

    앵두: 심각한 소리가 나는… 저분 의체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단테: ■ ■ ■■■ 받아들여 짊어지려 한다면 ■■■ 본래 마음 그대로의 ■■■ ■■■ 되어…

    이상: E.G.O? 그걸 말하려는 것이오?

    단테: 자신의 ■■■■ 바라본 세상에서.… 자아를 ■■■ ■■■■■, 자신만의 죄를 ■■■ ■■■ ■■■ 녹아들지 ■■■ 가능하게 될지니…

    홍루: 말투도 뭔가 저희 할아버지… 어?! 과, 관리자님! 머리!

    오티스: 관리자님! 머, 머리가 불타고 계십니다!

    료슈: 오~ 불꽃.

    싱클레어: 지, 진짜 터질 것 같은데요?!

    단테: ■■ 스스로 가릴 수 있는 자만이…

    히스클리프: 야! 저러다 쟤 죽는다고! 뭐 방법이 없어?

    돈키호테: 보, 본인도 모르오…!

    단테: ■■■■ 자각할 수 있는 자만이…

    여기서 단테의 독백은 타 언어판의 번역에서의 서로 다른 빈칸 개수까지 근거로 해 보통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죄에 삼켜져서 무너져 버리면, 그 무엇도 아닌 사람들이 꾸고 있는 일곱 가지 죄의 형태를 빌어 죄종으로 태어나고. 죄의 무게를 견뎠지만 자신의 죄를 부정하면 마음은 뒤틀리고… 죄 그 자체를 받아들여 짊어지려 한다면, 자아는 본래 마음 그대로의 형태로 구현화되어… 자신의 근원으로 바라본 세상에서… 자아를 휘둘러 견디어낼지, 자신만의 죄의 근원이 시작된 곳으로 녹아들지 선택이 가능하게 될지니… 죄를 스스로 가릴 수 있는 자만이…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는 자만이…

    죄는 기본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려는 마음, 또는 악행 그 자체’라는 뉘앙스로 자주 말해지지만, 최근 ‘일곱 개의 대죄’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러하듯 죄를 ‘욕망의 표현태 중 하나’라고 표현하고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죄종에 대한 호엔하임의 해석을 가져와 보자.

    …아무튼, 첫 번째 죄종은 붉은색의 분노 죄종이라네. 불이라는 건 한 번 타기 시작하면 더 태울 것이 없어질 때까지 태워버리려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

    그다음 죄종은 나태라네. 바위라는 건 단단하지만 그저 그뿐이야. 어떠한 방향도 없이 놓여있기만 하는 게 전부지. 나는 그것을 관성이라 부른다네. 누군가 굴려주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만큼 나태한 것이 어디 있겠나.

    다음은 탐식일세. 식물의 뿌리는 흙을 파고 내려가 양분을 채우려 하지. 중요한 건 양분을 얻었다고 만족하지 않는 점이라네. 양분을 가지면 가질수록, 뿌리는 더욱 넓게 파고든다네. 더 많은 양분을 얻기 위해 말일세.

    그럼 우울도 함께 설명하지. 자네들은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나? 가라앉는 건 어렵지 않다네. 하지만… 그렇게 깊게 내려갈수록 다시 올라오기 힘들어지는 법이라네. 온몸을 옥죄는 압박감. 발버둥 쳐도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는 허무감. 우울이란 그런 것이지.

    오만 죄종의 차례로군. 바퀴는 기술의 상징이자, 인간이 나아가고자 한 방향성 그 자체라네. 오만하게도 자연조차 이룩하지 못한 완벽한 원을 쫓아, 끝없이 바퀴는 구르지. 오만이란 결국 과한 자신감이기도 하지. 특히나, 먼저 앞서 나가거나, 실패하지 않은 자들은 쉽게 오만해지곤 한다네.

    다음은 색욕일세. 색욕이 의미하는 건 그 본의보다는… 그래, 자신을 이루는 무언가를 퍼트리고 싶다는 번식욕에 가깝겠군. 물론 거기서 그치는 개념은 아닐세. 단어 그 자체만으론 육신에 갇힌 해석을 내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상: 자신의 앎을 나누고 싶다,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 자신의 무언가를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한 것들 또한 색욕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구료.
    제법이군. 확실히 지성인과의 대화는 막힘이 없어 좋다네.

    정전기는 다들 한 번씩 겪어봤겠지? 누군가의 질투도 겪어보았다면, 그 둘이 따끔거리는 속성을 공유한다는 데 동의할 테지.

    이 해석에서 죄를 ‘악행’ 중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퍽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욕망’으로 치환해서 설명하면 훨씬 많은 부분이 더 설명된다. 이를테면 분노는 ‘노하여 무언가를 불태우듯 소멸시키려 하는 욕망’, 탐식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더 가지려는 욕망’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구태여 ‘욕망’이라 칭하지 않고 ‘죄’라고 칭한 것은 그 부정적 의미를 더하려 하는 것일 테니, 이를테면 ‘욕망에서 의지를 떼 놓고 보면 그 잔존물은 부정적일 테니, 부정적인 욕망의 발현태’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림버스 컴퍼니 안에서 마주한 뒤틀림들 중에서 죄종과 형태가 유사한 것이 등장한 것도 납득이 된다. 자아가 남아 있으나 그 욕망이 역으로 인간을 지배하여 뒤틀어 버렸으니, 그 욕망의 표출이 몸을 삼켜버린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단테의 발작 독백을 다시 풀어 보자.

    욕망만이 남아 과거도 미래도 없이 무너져 버리면, 그 무엇도 아닌 사람들에게 단지 남아버린 욕망의 일곱 가지 형태를 빌어 죄종으로 태어나고, 욕망의 힘을 견뎌 과거는 지켜냈지만(죄의 무게를 이미 존재하는 과거로 해석) 자신의 미래의 의지(자신의 죄-즉 의지로 해석)를 부정하면 마음은 뒤틀리고, 욕망 그 자체를 의지로서 진정으로 자각한다면, 자아는 본래 마음 그대로의 형태로 구현화되어 자신을 본질만을 남겨 바라본 세상에서, 과거가 정의하는 자아를 관철시켜 견뎌낼지, 그저 욕망 그 자체에 천착할지 선택이 가능해질지니, 욕망을 스스로 이해하고 정의(가리다를 영어로 conceal 이 아니라 define이라 했으니)할 수 있는 자만이, 의지를 자각할 수 있는 자만이…

    그렇다면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슬로건도 이해된다.

    FACE THE FEAR, BUILD THE FUTURE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림버스 컴퍼니의 슬로건도 비슷하게 변주된 것이 이해된다.

    FACE THE SIN, SAVE THE E.G.O

    림버스 컴퍼니는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 ‘고난을 마주하여 미덕을 각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를 만들려 한 것’을 뒤쫓아 ‘욕망을 직면하여, E.G.O, 그리고 사실상 동의어인 의지를 각성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보면 ‘고난을 마주하려 미덕으로 의지를 창출함으로써 미래를 만들려 한 회사’가 실패한 잔여물에서 욕망만이 남아 미래를 좀먹고 있으니, ‘그 욕망을 다시금 마주하여 미래의 근원이 되는 의지를 가진 자아’를 구원하려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엔젤라는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에서 ‘자신에게는 몫이 없던, 부정당한 지성체로서의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 ‘도시에 흩뿌려진 욕망과 의지를 다시 회수하여 자신에게도 인간으로서의 미래를 만들고자 반역’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파우스트는 ‘구 로보토미의 기술 잔재를 다시 복원하여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E.G.O는 미래의 전제 조건인 자아로서 복원하려는 것이 이해되는데, 황금가지는 왜 뜬금없이 림버스 컴퍼니 시점에서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기술 정수로서 등장하는 것일까?

    줄기에서 뻗어 나가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가지다

    4장에서 농담처럼 넘어간 베르길리우스의 대사다. 가볍게 보이지만 구태여 다시 인용하겠다.

    황금가지라는 건… 말 그대로 가지입니다. 줄기에서 뻗어 나가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그 가지는 황금색으로 빛나죠.

    이 장면에서 배경음악의 우스꽝스러움과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가지의 의미에 그저 황금을 덧댄 것이라 사실상 동어반복이라 베르길리우스가 답변을 우스꽝스럽게 거절한 것으로 보여 웃음을 자아내는 부분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지와 황금이라는 표상’에서 ‘핵심적으로 집중해서 봐야 할 부분을 짚어’준 부분이다.

    우리는 앞서 싱클레어가 ‘줄기’를 ‘하나의 세계선에서 뻗어나가는 여러 분기’로 언급한 것을 보았다. 나무에서 뻗어 나온 것이 하나의 줄기일진대, 그렇다면 그 줄기에서 또다시 뻗어 ‘나가고자’ 하는 부분, 즉 ‘의지에 의해 분기 안에서 또다시 분기된 미래’일 것이다. 말 그대로 의지가 미래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금가지는 ‘욕망과 의지에 의해 무수히 만들어져 나갈 미래의 가능성의 응집체’이며, 프로젝트 문의 인간찬가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그 모든 ‘가능성’이 ‘황금처럼 눈부시게 찬란한’ 것은 필연일 것이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진짜 특이점은 바로 ‘부정형을 구현화’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물, 즉 인간 전체가 갖는 근원적 무의식에 라틴어로는 ‘코기토’, 즉 ‘생각’으로 닿는다. 하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바로 이 ‘코기토’가 없기에, 오롯이 카르멘의 신경망에서 만들어 낸 두레박에만 코기토가 있다. 이 과정에서 환상체가 발생하고, 이것을 관리하여 엔케팔린이라는 에너지원을 얻어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든 사고의 틀 안에서 황금가지와 이 회사의 핵심을 어떻게 이을 수 있을까?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두레박으로 각자만의 코기토를 길어야만 한다’고 언급된다. 우리의 사고의 틀에 맞춰 다시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각자가 자신만의 생각을 이끌어내야 한다. 즉, 각자가 자신만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사람들이 ‘코기토’가 없는 것은

    사유, 즉 의지가 없다

    로 다시 번역된다. 마음의 병이라고 부를 만하다. 의지 없는 인간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타인의 무의식에 카르멘의 코기토가 주입되는 것은

    사유가 없는 인간의 가능성과 사유 원천인 무의식에 개입하여 강제로 사유를 끌어올리는 과정

    이 된다. 그렇다면 환상체는 정제되고 구체화되지 않은 두려움의 표상으로서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의 ‘본능, 통찰, 애착, 억압’ 작업은 이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한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엔케팔린, 꼭 진통의 호르몬의 이름과도 닮은 에너지가 추출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두려움을 진통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은 ‘사유를 어떻게든 이끌어내어 미래를 만들고, 인간의 미래를 창조하고자 한 회사가 그 생각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을 극복하여 미래로 갈 원동력을 강력한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무의식에서 끌어내 계속해서 도시에 흩뿌리다, 마침내 그 무수한 의지의 가능성이 만들어낼 미래까지도 도시에 퍼뜨린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모든 시간 줄기의 가능성이 ‘황금가지’로 표상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회사의 궁극적 목표에 아직 부여되지 않은 형태를 그저 채워 넣은 것에 불과하다. 실상은 그 행동이 이미 형태를 정의할 수 있는 단계까지 묘사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게젤샤프트로 다시 돌아가 보자.

    멍청한 파우스트: 그렇다면 다시 파우스트가…

    냉철하고 똑똑한 파우스트: 불가능한 가정을 구태여 세울 필요는 없을 텐데요. 멍청한 파우스트가 제일 많은 황금가지를 복원했다지만, 다시 관리자 파우스트가 될 순 없어요.

    완고하며 주도적이고 교묘한 파우스트: 그래도 묘목을 심고, 거기에서 사과 열매를 따온다면 혹시 알아요? 다시 관리자 파우스트가 될 수 있을지.

    이 대사들도 이 틀 안에서는 이 순서로 사고가 도출된다.

    1. 림버스 컴퍼니의 세계선 파우스트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모았다.
    2. 그것을 잘 틔워내 성과를 내야 한다.
    3. 가능성의 성과는 미래다.
    4. 게젤샤프트는 이것을 위해서 여러 세계의 파우스트들이 협력하는 이익사회 체계다.

    그렇다면 다름 아닌 황금가지가 그렇게 파우스트에게, 버스팀과 림버스 컴퍼니에게 중요한 이유가 설명된다.

    좋다. 이제 림버스 컴퍼니와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사이의 연결점이 이 틀 안에서 선명해졌다. 그렇다면 림버스 컴퍼니가 N사와 적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못, 망치, 현상학, 고정

    Nagel und Hammer, 독일어로 ‘못과 망치’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너무나도 노골적이기에, N사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표상과, 선배 철학자인 후설의 표상으로 해석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먼저 림버스 수감자들 중 눈에 띄는 N사 인격 둘, ‘쥐는 자 파우스트’와 ‘쥐어들 자, 혹은 쥐어질 자 싱클레어’의 관계성을 보겠다.

    못과 망치라는 표현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쓴 저서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표현은 다음을 질문하기 위해서 등장한다.

    손안에 있는 존재, 눈앞에 있는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사물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가?

    우리가 못을 박을 때, 우리는 망치 그 자체의 존재 의미나 개별성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건 ‘못을 박는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지 망치 그 자체가 아니니까. 그 과정에는 심지어 ‘망치가 손안에 있다’는 사실보다도 ‘못을 박는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와 같이 목적성에 따른 관계 안에서 도구와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을 ‘손안에 있는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표현했다.

    그런데 망치나 못 중 하나라도 망가져서 더 이상 망치가 ‘통상적인 기능’을 잃게 된다면? 그럼 더 이상 못을 박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망치는 목표성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망치는 바라봐야 하는 것으로 강제로 고정된다. 관계성이 사라져 비로소 대상화가 되자, ‘못을 박는 것’이라는 틀 말고의 의미가 발견된 이 상태를 하이데거는 ‘눈앞에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이 틀 안에서 해석하고자 노력했다. 관계는 서로 사용되고 사용되는 관계 안에서 각자의 개별 의미를 잃고 관계 안에서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존재 망각’이다. 그러나 그 쓰임이 손상되었을 때 비로소 그 대상 자체가 보인다. 이것이 바로 ‘못과 망치’가 표상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N사 완전 분석이라는 다른 커뮤니티의 글에서 어떤 분이 분석해 주셨듯이, 그래서 거울세계에는 ‘쥐는 자 파우스트’와 ‘쥐어들 자, 즉 쥐어지는 자 싱클레어’라는 지시적 관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해석하기에는 하이데거에게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으로는 다루기 힘든 것들이 있다. N사는 유달리 ‘경험’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데, 이는 베르길리우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언급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약지가 보는 것만 믿는 자들이라면 N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회사다. 약지들과 추구하는 바가 겹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

    그리고 본래 못과 망치의 은유에서 하이데거가 다루려고 한 것은 ‘관계’이지 ‘못 자체의 기능성’은 아니다. 그렇다면 ‘못을 통해서 개인의 경험을 추출한다’는 N사의 못 자체의 기능성이 강조되는 부분은 하이데거만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딱 맞아 들어가는 조각이 아니게 된다. 이 지점에서 N사는 단순히 하이데거에게만 가져올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이데거의 선배격 철학자인 후설을 끌고 와야 비로소 더 단단하게 구조화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모든 현상은 의식이 체험한 시간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루가 어떻게 존재하나? 내가 걸어간 길, 내가 마신 차, 내가 앉았던 의자의 연속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의자에 앉은 순간’에 집중한다면, 현실에서의 나의 물리적 존재와 별개로 의식 속에서는 ‘의자에 앉은 순간’이 실제로 체험된다. 그렇다면 N사가 못을 통해서 추출하는 것은 ‘기억’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경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못으로 사람을 찌를 때마다 못 가운데의 투명한 창에 기억이 차오르고 이를 가공해 경험 통조림을 만든다’고 했지만, 이는 히스클리프의 차원에서 플레이어에게 다소간의 변형을 감수해서라도 쉽게 전달하려는 수사인 것으로, 실제로는 상표명을 다시 한 번 제시해서 ‘이것은 이 인간의 의식에서 추출해낸 경험 그 자체다’라고 확실하게 고정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조금 더 맞겠다. 그러면 ‘N사는 언제나 인간성을 해석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며 고통도 응당 겪어야 하는 경험이라며 의체 사용자들을 비난했다’는 뫼르소의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도 설명된다.

    또한 베르길리우스가 앞서 지적한 ‘보임’ 또한 후설의 렌즈로 더 들어가 볼 수 있다. 후설이 말한 ‘나타남’은 언제나 특정한 관점에서 존재한다. 가령 앞선 하루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 그 경험은 의식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시점과 위치와 감각으로, 내가 마시던 바로 그 차의 차가움이나 따스함으로 존재한다. 후설은 이것을 ‘신체화된 주관’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인식 세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신체의 존재 자체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전제 없이는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도 ‘손이 느꼈던 온도’나 ‘내가 의자에 앉아 있던 자세’에 대한 자각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구체화된 경험이 있기 위해서라도 ‘신체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면, N사 광신도들이 왜 의체 사용자들을 ‘거짓’ 혹은 ‘오염’이라고 불렀는지 이해된다. 그것은 N사가 중시하는 경험에서 전제되는 ‘보이는 것’의 전제 조건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또한 같은 문장에서 말한 약지와 N사 사이의 관계는 림버스 컴퍼니 6장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서 약지는 헤르만과 아세아, 즉 N사와 협력하게 된다. 보이려는 자와 보려는 자 사이의 들어맞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구조화가 더 용이하다는 것도 이 해석의 설득력을 더 강화한다.

    자, 그렇다면 N사가 후설과 하이데거에게서 많은 개념을 갖고 왔다는 것까지는 정리가 됐다. 그래서 이들은 왜 L사의 정수를 가지려 하고, 림버스 컴퍼니와는 반목할까?

    먼저 N사, 그중에서도 특히 더 직접적 적대 세력인 헤르만을 봐야 한다. 앞서 짚었듯, 헤르만은 ‘모든 거울 세계의 창백한 고래의 파괴’를 약속하면서 에이해브를 영입하고, 모든 존재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반죽’을 만들어 내며, 또 H사가 이뤄 온 모든 기술들의 뿌리가 되는 선황충을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우니, 충분히 쓸 만한 시료일 터’라며 회수한다. 뒤의 두 가지를 보면 림버스 컴퍼니의 목표와 일견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에이해브를 끼워 넣는 순간 얼핏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 듯한 사람들이, 왜 거울 세계에서 파괴를 하려는 걸까?

    이렇게 보면 어떨까?

    헤르만은 모든 다른 거울 세계의 가능성을 한곳에 겹쳐두고 단번에 파괴하고, 동시에 황금가지를 회수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통제해 고정하려고 한다.

    이상은 거울을 통해서 절대 만나지 않는 서로 다른 세계를 비춘다. 그러나 반사와 달리 투영과 굴절은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리바이어던의 다음 문구를 다시 보자.

    “대단, 정말 대단해요. 가넷! 이 정도의 굴절률에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니… 후.”

    유리창 너머에서 점순이의 말이 들려왔다.

    (중략)

    아세아라는 자는 처음부터, 유리벽 너머의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유리창 기술은… 비록 흐릿할지라도 여러 개의 세계를 겹칠 수 있네.”

    “비록 거울만큼 안정적이진 않더라도, 많은 세계를 중첩시킬 수 있지.”

    그 눈빛이 내 몸 구석구석을 천천히 향한다. 마치 뱀이 휘감고 다니듯,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의 오른팔과 왼팔, 몸통과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를.

    실제로 이들의 의도가 거울 세계의 ‘가능성’을 비추고 바라보기보다는, 실제로 지금 실존하는 세계의 한 곳에 중첩시키는 데 더 있다는 것을 쉽사리 읽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반죽’을 찾으려 하고 그 연구 대상으로서 그에 가장 가까운 ‘선황충’을 연구하려는 것도 이해된다. 모든 세계를 파괴한 다음 모든 가능성의 원형을 손에 쥔다면, 거기서 발현될 가능성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또 다른 재료인 황금가지를 회수하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다만, 그 가능성으로부터 파우스트는 미래와 운명을 보존하려는 축이라면, 헤르만은 그것을 파괴하거나 통제하려는 쪽이라는 데에서 비슷하지만 핵심적으로 다르다. 같은 재료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임으로써 완전히 달라지는, 절대 이성질체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것이 N사의 목표와는 어떻게 이어질까? 헤르만이 지금까지 N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헤르만의 지향점과 N사의 지향점이 최소한 비슷하기 때문일 텐데 말이다.

    N사의 철학이 하이데거와 후설에 기반하고 있다고 앞서 해석했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체험된 시간’이라는 표현이다. N사의 자살 자판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현실의 ‘조력 자살’ 장비보다는 하이데거가 말한 못과 망치에서 이어지는 ‘실존적 의미’에 대한 체험이라는 추측에 더 무게를 둔다. 삶의 쓰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죽음을 앞두고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먼저 경험해 봐야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자각한다’고 했다. 따라서 자살 자판기는 바로 ‘이 죽음에 대한 경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편이 자살 자판기가 ‘관광 상품’이라고 묘사되는 것과도 더 매끄럽게 이어지니까.

    여기서 후설을 다시 덧대면 모든 의식에서의 경험은 ‘시간 특정한 편린의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 ‘의식’하여 ‘경험’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무한한 시간과 가능성들에 의해서 그 의미와 중요성이 퇴색된다면 그 무게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면, N사 입장에서도 가능성의 통제와 고정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즉, 의체 혐오 광신도 집단과 헤르만은 N사가 중시하는 ‘경험’의 서로 다른 면에 집중하는 것이고, 이것이 서로 다른 두 파벌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헤르만의 림버스 컴퍼니와 충돌하는 방향성이 여전히 N사 안에서도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다.

    파우스트의 E.G.O와 욕망, 그리고 불확실성

    좋다. 우리는 지금까지 꽤 많은 것을 이어 붙여 보았다. 그런데 정작 LCB 세계선의 파우스트의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추론한 바를 적용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기본 파우스트 인격의 죄악 속성은 오만, 나태, 탐식이다. 즉, 파우스트가 바라는 것은 전진하고자 하는 방향성, 가만히 있고자 하는 관성,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미래를 보존하며 그 안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닿고자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안전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택한 현명한 방법인 ‘게젤샤프트 내에서 서로의 관측’에 ‘역으로 얽매여 있는 관성’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그 게젤샤프트와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 힘으로 그 세계에 스스로 발을 내리며 사실상의 ‘남이 움직이는 관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탐구하는 재미를 다시 알아가게 된다. 파우스트의 에고의 죄악 속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오만’이지만, 동시에 그 안의 그림에서는 파우스트의 것이 아닌 그림자가 어디론가 가야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도 설명된다. 파우스트의 의지는 그래서 오만한 나태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것이 6.5장에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2장에서야 체념에 가까운 농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불확정성을 믿는 파우스트’가 되지만, 워프특급 살인사건에서 파우스트는 조금 더 불확정성을 믿기로 한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단순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관측’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파우스트는 여전히 게젤샤프트에 의존하고 있다. 그 불확정성은 ‘목표 지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게젤샤프트가 목표한 중간중간의 그 지점에는 변함이 없되, 완전히 확정하는 것이 어려운 ‘중간의 과정들’을 채워 넣기 위해서는 결국 예측에서 공백인 부분은 스스로 채워 넣어야 하니, 바로 그 부분에서의 불확정성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해석한 것이 참이라고 전제했을 때, 파우스트는 다음 대화에서 보듯 그 지향점 자체를 이제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파우스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저 역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더군요. 당장 앞으로 가야 할지, 멈춰서야 할지. 혹은 반대로 가야 할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선택까지도… 그때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파우스트는, 언제든 떠나가 버릴 수 있는 이름에 불과하다고.

    파우스트는 게젤샤프트가 ‘모든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지만, 그래서 자신에게 말하는 나아가야 할 곳’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 시점에서 파우스트에게는 이제 ‘지향점’ 자체도 불확정성에 포섭된 것이다. 전투에 패배하는 것이 곧 ‘운명 상실’로 이어지는 상황에 놓인다면, 파우스트는 더 이상 게젤샤프트가 관측하게 제공하는 미래가 ‘자신이 바라는 미래’에 대한 기댓값에서 확률까지 높게 잡는지 충분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파우스트의 캐릭터 PV 영상의 대사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파우스트는 공포에 빠지고 두려워할지언정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두려운 만큼 게젤샤프트에게서 위험 요소를 이제는 독자적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싱클레어에게는 표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비록 싱클레어가 그가 질문을 끝내기 전에 답했지만 말이다.

    어느 싱클레어는 그러나 그 무엇 하나 명확하게 대답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있는 분기에 가닿을지도 확정해 주지는 않는다. 어느 싱클레어는 대신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슬퍼하지는 말라’고 조언한다. 동시에, 호엔하임이 불려온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싱클레어는 파우스트의 목적을 설령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완전히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다른 것을 떠나서 ‘줄기’를 직접 언급했으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파우스트가 현재 시점에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모호하게 답할까? 오히려 자신의 분기에서의 가능성 중에서 오답이 된 것을 배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어느 싱클레어가 실제로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느 싱클레어가 한 말 중 배척의 말로 행해진 것은 ‘모든 것을 한 번에 슬퍼하는 것’이다. 슬퍼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파우스트만이 할 수 있는 ‘앎’은 곧, 게젤샤프트의 관측이다. 여러 거울 세계를 통해 ‘모든 것을 한 번에 슬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싱클레어의 이 말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관측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두려워하지 마라

    이런 상황을 생각할 수 있겠다. 파우스트는 게젤샤프트에 의존하지만, 그 게젤샤프트에 의해 아는 것은 결국 추론으로 ‘가장 높은 가능성’일지언정 ‘사실로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이곳에서는 태풍이 될 수 있듯, 관측을 통한 예측에는 언제나 공통 사항과 미묘하게 다른 불확실성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을 제대로 탐색하지 못했기에 어느 싱클레어의 파우스트는 관측 안의 ‘불확실성’으로서의 위험을 회피하려다, 오히려 그 안의 가능성을 자신이 앞서 닫아버리고 실패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아는 자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어느 싱클레어가 현재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라는 앞의 추론을 사실로 밀어붙이면, 지금 가장 ‘가능성 높은 분기에 대한 관측’은 이미 파우스트가 상당히 빠져버린 함정이고, 그래서 어느 싱클레어가 돌이켜 봤을 때 ‘과거가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바로 그에 대한 경고이자 경계일 수 있다. 그렇기에 싱클레어 또한 오히려 ‘불확실’하게 경고한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어쩌면 파우스트가 질문한 것은 이전의 의도에 더해, ‘자신의 예측에 뒤섞인 불확실성을 게젤샤프트가 감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파우스트가 ‘순진한’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것도, 어쩌면 합리적인 다른 파우스트들의 관점에서는 불확실성에서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 못마땅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내 추론이 사실이라면, 이제 파우스트는 더 큰 불확실성의 숲을 지나야 할 것이다. 그것이 두려울지언정, 일찍이 관측하지 못한 변수를 만들어 내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것이 로보토미의 세피라들과 A가 통과했던 것처럼, 롤랑과 엔젤라가 통과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파우스트가 그대로 돌파하고 나가야 할 ‘깨달음’을 위한 고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료슈의 이야기에 섞인 림버스 컴퍼니의 이야기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구조 안에 얼추 짜맞췄다. 아직 짜 넣지 못한 것들은 구태여 이 이야기를 왜 김지훈 디렉터는 ‘료슈’의 장에 감정선 빌드업을 더 할 기회를 타협해 가면서 밀어붙였는가, 그리고 디아스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도다.

    이미 림버스 컴퍼니는 3장 이후 분량을 대폭 확대해 가면서 이야기의 감정선을 더 세밀하게 묘사하며 증폭시켜 왔고, 이것이 림버스 컴퍼니가 뒤로 가면서 점점 더 고평가를 받은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를 희생하는 것은 오히려 모험이다. 물론 어느 인물의 장에 들어가건 그 인물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하필 료슈가 선택된 것은 분명하게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료슈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라야시키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야시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작중에서 답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천착해 온 단어이기도 하다. 바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

    만약 우리가 오늘 밀어붙여 온 모든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정말 자아가 온전한 욕망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무수한 분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를 구할 수 있다면, 그 과정 전체가 시간의 흐름이라면, 료슈의 이 재능은 베르길리우스나 파우스트의 것과는 다르다. 베르길리우스는 현재라는 과거-미래의 경계 사이에서, 파우스트는 어떤 미래의 시점들을 관측하는 것이지만, 료슈는 그 전체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라야시키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도록 베어낼 때’ 기억이 사라진다고 ‘관측’되지만, 실상은 그리 하기 위해 발도자의 존재의 연속성, 다시 말해 시간 자체의 인과성을 빌려와 잘라내는 것이 진정한 원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뤼엔이 결국 죽어야 하는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가 사용하는 특징적 무기는 ‘제논의 거북나선’이다. 제논의 역설은 그 유명한 ‘빠른 아킬레우스는 먼저 레이스를 시작한 느린 거북이를 절대 앞설 수 없다’는 궤변이다. 이 역설은 사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넘어서는 시점을 관측하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에만 비로소 유지될 수 있다. 이 역설이 나오는 시점에는 ‘무한소’ 개념이 없었기에, 무한히 더한다고 해도 특정 임계를 넘을 수 없다는 수학의 ‘유계’ 개념이 없었다. 바로 그 경계를 넘어서면 이 역설은 깨진다. 이것을 게임 안에서는 ‘계속 파고들지만 반대편으로 뚫고 나가지는 못하는’ 거북나선의 특징으로 설명했다. 뤼엔은 지령에 갇혀 과거와 미래 사이의 경계인 현재라는 경계를 뚫는 것을 포기하고, 과거의 추억에 갇혀 자신의 양딸인 료슈가 자신과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료슈는 그를 거절하고 나아간다. 그 한계에 갇힌 뤼엔은 결국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손가락이 이 이야기에 얽히는 것은? 서사적 당위성은 당연히 료슈가 거미집 아비들의 딸이기 때문이지만, 주제의식의 흐름으로 보면 다르다. 손가락은 각각 엄지부터 소지까지 예·신·의·지·인을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미덕’에는 ‘의지’가 뒤틀려 있다. 우리는 앞서 욕망에서 시작하여 미덕을 각성해 진정한 의지로서 자아를 관철하는 프로젝트 문의 이야기의 특성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마치 ‘미덕을 먼저 정해두고 행동하기에 의지가 정작 비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또 다른 하나의 고난이다. 가닿아야 한다고 강제된 미덕 또한 진정한 의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욕망에만 굴종하도록 속삭이는 카르멘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이다. 어쩌면 파우스트가 5장에서 중지를 마주한 것에 당황한 것은 단순히 이 정도의 무력을 마주하는 것은 관측된 바 없었다는 뜻일 뿐 아니라, 바로 이 ‘시험’에 마주하기에는 수감자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예정에 없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시간의 흐름이 얽혀야만 하는 료슈의 장에서는 결국 손가락의 흐름이 첫 시험으로서 어차피 엮이니, 거기에 싱클레어도 같이 엮은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디아스는 어떤 사람일까? 우선 디아스에 대해 우리가 아는 사실은 대부호라는 점, 그리고 1차 연기전쟁을 사실상 뒤에서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점,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대신 그 대상에서 관심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 정도로 자기 욕망에만 충실하고, 그것을 구현할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에도, 림버스 컴퍼니에도 개입한 것은 일관된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회사에 대해서 ‘가능성의 탐색’이라 추론한 것을 사실로 전제했을 때, 디아스 또한 이 가능성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베르길리우스와 파우스트가 하는 ‘가닿으려 하는 미래’에 대한 추구보다는, 그 모든 가능성의 미래에서 자신의 이익을 당겨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림버스 컴퍼니가 모노리스를 도시 여기저기에 퍼뜨린 것도 이해가 된다. 황금가지를 통한 진정한 미래 개변이 아니라, 모노리스를 통해 강제로 미래를 개변시키는 중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LCB 팀의 목적과는 탐색이라는 행위는 같지만 그 지향점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마뜩치 않아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N사와 림버스 컴퍼니가 ‘절대 이성질체’ 관계로서, 구성 분파의 지향점이 대립하는 관계까지도 이성질체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동시에, T사에서 모노리스가 발견되고, 그 모노리스가 T사에 다시 매각되는 이야기가 6장을 기준으로 직전 .5 스토리로서 이루는 대구도 대칭적이고. T사는 다름 아닌 시간 그 자체에 개입하는 회사이니 말이다.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이 그토록 시간과 관계가 깊은 회사라면, 시간과 밀접하게 연관된 T·W·R사가 로보토미와 접점이 많았던 것도, 그중 T사와 W사는 림버스와도 연관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맺음말

    물론 이 모든 것은 아직은 관측이고 예측이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로 늘 수렴해야 하고, 아직까지 일관성이 연결되지 않은 이야기를 모두 설명하기에, 가장 설득력 있으면서도 가장 적은 가정을 추가해서 도달 가능한 설명이라 생각하기에 한번 작성해 보았다.

    P.S. 이 관점에서 이전에 등장한 허버트나 데미안의 말들도 일관되게 이을 수 있다. 허버트는 외곽에서 ‘꿈을 이루고 더 이상의 소망이 없어 꿈이 멈춰버렸’ 고, 또 시간의 흐름은 욕망과 바람의 흐름 연쇄 또한 낳지만 좌절에서 오는 고통 또한 낳기에 이를 멈추기 위해서는 시간을 멈추면 된다 말했지만, ‘불확정성’ 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음을 발견했고, 그 때문에 이 가능성을 다시 탐구하기 위해서 모노리스를 림버스 컴퍼니에서 양도받은 것으로도 읽힌다. 그에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은, ‘욕망’을 다시금 일깨웠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지금 당장 자신이 있는 순간들에 충실하고, 자신의 것을 완벽히 하기 위한 욕심으로 다른 가능성을 빼앗아 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과자와 장미 이야기를 가져온 것으로 깔끔하게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수천 송이의 장미꽃들’은 지킬 필요가 없고, 동시에 겨울을 ‘나로부터 빼앗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파우스트의 접근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비판일 것이다.